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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9.10. 안중근 의거 100돌을 맞이하며!-[이만열칼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자 2022-08-09
조회수 12
올해 10월26일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날은 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해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만 초점을 맞춘 이 글에 그 역사의식도 공유되었으면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다.
이 강탈에 가장 앞장선 일본인이 이토였다. 그는 법을 공부한 사람이었지만 당시 통용되는 국제법 절차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 해 11월 을사늑약을 강제했고, 한국 황제의 비준이 없었지만 그 조약의 부당 시행에 가장 앞장섰다.

을사늑약에 따라 초대 통감이 된 그는, 불법조약 비준을 끝내 거부하고 헤이그 세계평화회의 등에 일제의 불법을 폭로하려는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내쫓아버렸다.

이어서 한국 군대를 해산하고 정미 7조약으로 한국의 내정 행정권마저 빼앗아 갔으니, 이토야말로 한국의 식민지화에 가장 앞장선 일본 정치인이었다. 바로 그가 하얼빈 역두에서 그날 오전 9시반쯤 안중근이 쏜 총탄에 쓰러졌던 것이다.

안중근의 총탄, 그 후 100년

안중근은 황해도 신천에서 부친 안태훈을 따라 갑오의려(義旅)의 선봉으로 농민군을 격퇴하기도 했지만, 개화에 눈뜬 천주교인으로 진남포로 나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에 매진했다. 일제의 겁박이 자심해지자 호방한 그는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추로 옮겨 의병전쟁에 투신했다.

1908년 6월, 그는 한국의병 참모중장으로 부대를 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에 들어와 일본군을 포로로 잡았지만, 국제공법에 따라 그들을 석방해 주었다. 그 때문에 일본군의 역격을 받아 12일 동안 두 끼 밥으로 고생하며 연추로 돌아온 그가 11명의 동지와 함께 절치부심 단지(斷指)동맹을 맺었다.

이토의 하얼빈 내방 계획을 알게 된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가서 거사를 실행했다. 뤼순 감옥에서 쓴 자서전격인 <안응칠 역사>에서 그는 이토의 죄상을, 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등 15가지로 나열했고, 재판장에게는 이토 제거 이유를 이렇게 진술했다.

“이토 공작이 일본에서 일류 인물이고, 또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는 잘 안다. 그가 통감으로 한국에 와서 5개조 및 7개조의 협약을 병력에 의해 강제로 성립시킨 것은 결코 일본 천황의 성려(聖慮)에 따라서 한 것이 아니므로 일본 천황을 속인 것이나 다름없다. 또 이것은 한국 상하의 신민을 기만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없앰으로써 오늘날 한국이 처한 비참한 지경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독립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나의 목적을 실행한 것이다.”

이 진술은, 러·일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해주겠다는 일본의 약속을 믿고 일본군의 승리를 ‘자기 나라의 개선’과 같이 기뻐했던 한국의 한 지식인이 거물 이토를 왜 사살했는가를 나름대로 밝힌 내용이다.

의거 후 일본 영사관에 넘겨진 그는 일본 법정에 회부되었다. 그의 재판 관할권 문제는 당시에도 이미 부각된 것이었다. 일본인 변호사가 그의 의거를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변호하자, 그는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오해는 무슨 오해란 말이오”라고 반박하면서, 자신은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의무를 감당하다가 교전 중에 포로가 되었으므로 정당한 포로 대우와 만국공법에 따라 재판해 줄 것을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재판은 일방적이었다.
‘동양평화론’ 저술을 위해 사형 집행 날짜를 한 달 정도 연기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는 상고를 포기했지만, 일제는 그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다.

‘동양 평화론’ 한세기를 앞섰다

뤼순 감옥에서 그가 보인 의연함에는 간수들도 감동했다. 미완의 ‘동양평화론’에서 밝힌 그의 포부는 갈등을 빚고 있는 동양 3국에 지금도 한 세기를 앞선 선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북의 못난 후예들은 그가 추구했던 ‘동양평화’ 사상은 물론 나라가 독립하거든 자신의 시신이나마 조국에 묻어달라는 유언마저 외면한 채 고혼(孤魂)을 떠돌게 하고 있다.

   경향신문 2009.10.21자 [이만열칼럼]이토를 사살한 당당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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