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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9.06. [여기는 독도] 역사⑦-안용복 처분과 朝·日 외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자 2022-08-09
조회수 77
안용복. 과연 그는 호국의 화신인가? 일본으로부터 울릉도·독도를 지키기 위한, 단 하나의 우국충정으로 목숨을 걸고 두 번째 도일을 한 것일까? 그것도 노비의 몸으로…. 또 상승(商僧) 뇌헌이나 선비인 이인성은 그 험로를 어떻게 선뜻 따라 나섰을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안용복이 백기(伯耆) 부태수와 대좌할 때 막부에 올린 소장(訴狀)에는 3년 전 대마도주가 서계(書契)를 탈취한 내용과 함께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쌀은 15말(斗)이 한 섬인데 대마도에서는 7말을 한 섬이라 하고, 베는 30자(尺)가 한 필(疋)인데 대마도에서는 20자를 한 필이라 하고, 종이 1권(卷)은 잘라서 3권으로 늘여 속이고 있습니다.'(춘관지)

에도에 있던 호키 태수에게 이와 같은 상소 내용이 당도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조선인 출륙금지령'을 내린다. 상소 내용은 안용복 일행의 거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대마도주에게도 전해졌다.

대마도주는 막부의 무거운 처벌이 예상되자 호키 태수에게 소장 취하를 교섭한다. 뿐만 아니라 당초 막부가 나가사키(長崎) 봉행소를 통해 정식 소송을 접수하도록 방침을 세운 것을, 대마도주는 나가사키를 들르지 않고 곧바로 되돌아가도록 농간한다.

이에 백기태수는 안용복이 낸 소장을 막부에 납입하지 않고 취하해버린다. 대신 안용복 일행에 고위 관원을 보내 월경한 일본인 15명을 적발, 처벌했음을 알린다. 또 "두 섬이 귀국에 소속된 이후에 다시 범월(犯越)하는 자가 있거나 대마도주가 횡침(橫侵)할 경우 국서를 작성, 역관을 통해 보내면 엄히 처벌할 것"을 약속한다.

대마도주와 백기태수 그리고 막부의 음모로 안용복 일행은 나흘을 항해한 끝에 8월 6일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양양으로 돌아온 안용복은 곧바로 월경죄로 강원도 감사에 체포돼 투옥되었다가 비변사로 압송된다. 이때 조선 조정은 안용복 처결문제를 놓고 일대 논란이 일어난다.

영의정 유상운과 좌의정 윤지선, 우의정 서문중 등 3정승은 국법에 따라 사형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남구만·윤지완 등은 어전회의에서 대마도의 농간을 알았고 울릉도와 자산도를 지키는데 공이 있음을 감안하여 죄를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갑론을박 끝에 안용복은 감형되어 귀양형으로 결정되었다.

울릉·자산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대마도주는 일본 막부가 내린 '울릉·자산도 도해금지령'을 1년이 지난 이때까지 조선 조정에 통보하지 않고 미루고 있었다. 안용복의 두 번째 도일 후 대마도주는 더 이상 막부의 결정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다. 1697년 1월에 사신을 보내 일본 막부의 결정을 조선 조정에 알린다.

1693년 안용복이 처음 일본으로 피랍되면서 발단이 된 조·일 간 울릉·자산도 외교 마찰은 이로써 완전히 매듭을 짓게 되었다. '울릉·자산도는 조선의 땅으로 앞으로 월경하는 자를 적발하여 알려주면 처벌하겠다'는 것으로…. 과연 이와 같이 울릉·자산도를 지킨 안용복은 구국의 화신이며 단지 호국 일념으로 목숨을 건 일본행을 감행했을까?

안용복은 두 번째 도일 때 두 개의 호패를 차고 있었다. '통정대부 안용복(安龍福) 갑오생 동래(東萊)'라고 적힌 것과 '사노(私奴) 용복(用卜) 연삼십삼(年三十三) 무업(無業) 주경거(主京居) 오충추(吳忠秋) 부산 좌천리 13통 4호'라고 적힌 것이다.

통정대부 호패는 가짜이며, 서울 사는 오충추의 외거노비 용복의 호패가 안용복의 정확한 신분으로 학계는 파악하고 있다. 즉 안용복은 부산 왜관(倭館) 근처에 살아 일본말에 능통하며, 능로군 출신으로 뱃길에 밝은 부상대고(富商大賈) 오충추의 사노였다는 것이다.

그는 오충추의 비호 아래 대선단을 이끈 무역상이었을 것이란 추론이 나온다. 이 때문에 울릉·자산도에서 삼(蔘)을 채취하고 전복을 따서, 대마도를 거치지 않는 새로운 무역루트를 개척하고자 한 '무역왕 장보고'와 같은 인물이었다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영남대 독도연구소 김호동 교수 논문)

아직 어떤 계기로 안용복이 쟁계(爭界)를 일으키게 되었는지는 더 천착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영웅스런 행동'으로 울릉·자산도를 지킨 사실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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